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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8 studs

Happy Motoring vol.1

 

 


지금으로부터 약 반세기전, 레고사는 기존의 700/x 베이직 셋트 이외에 Town Plan 시리즈를 새로이 출시하였습니다.

Town Plan 은 7개 파티션으로 분할된 플레이트 보드를 무대 삼아 그 위에다 각종 건물과 집, 그리고 1:87 스케일의 악세서리 등을 다채롭게 배치할 수 있게끔 설계된 시리즈입니다. 레고식 디오라마의 개념과 원형을 최초로 정립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높은 제품군인데요, 워낙 오래된 희귀품이다보니 시세란 것이 의미가 없고 수요층도 골수 빈티지 수집가들을 위주로 통용되는 등 오늘날의 대중적인 관점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레고이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제품은 바로 Town Plan 시대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플라스틱 레고 역사상 최초의 주유소 모델로 알려진 Esso Service Station 셋트 (이하 #310) 입니다. 플라스틱이라고 따로 표기한 이유는 무려 목재 장난감 시절에도 Esso 주유소가 있었기 때문이죠.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는 바로 이 주유소가 되겠군요. 아래 사진이 구글에서 입수한 목재 레고입니다. 보존 상태를 논하기에 앞서 정확한 생산년도 조차 가늠이 안되는, 그야말로 슈퍼 레어 빈티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 제품은 1956년 북유럽 3개국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한정으로 처음 발매되어 이듬해인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대륙으로 확장 판매되었으며 1965년에 단종되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의 여타 타운플랜 시리즈 제품들이 그러하였듯, #310도 공식 생산기간 동안 국가별 및 시기별로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되어 제작되었습니다. 먼저 북유럽 3개국 한정으로 출시된 초기버젼(1956년~1958년)은 레고블럭이 slotted brick 형태였으며, 제품번호는 #1310 이었습니다. 1957년 여러 유럽대륙 국가에 선을 보인 제품은 번호가 #310 이었고 내용물 또한 북유럽 국가 버젼과는 다르게 오늘날 모습의 레고블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59년에 이르러 전유럽이 비로소 오늘날 레고블럭으로 똑같이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제품번호도 #310 으로 통일되었지요.

박스아트 또한 서로 다른 세 가지 버젼이 존재합니다.
1958년까지 생산된 제품들의 박스 포장은 아래와 같은 고전풍의 삽화 형태였습니다. 왼쪽 하단에 빨간색 오버롤즈를 입고 있는 타운플랜 마스코트가 눈에 띄는군요. 정말 포근하고 앙팡진 모습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캠퍼밴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폭스바겐 T2 도 보이는데 대략 1955 ~ 58년식 T2 로 추정됩니다. T2 가 오래된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역사였음에 놀라고, 이 때의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채 몇 년 되지도 않은 격동기였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게 되네요.

 

 

 



1959년엔 레고사에 사진촬영 전문 부서가 따로 신설됨에 따라 예의 이러한 삽화방식의 박스아트는 실물 사진으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당대 여러가지 타운플랜 제품군의 박스 디자인이 싹 한번 물갈이 되는데, #310 의 경우 특별히 1959년과 1960년 두 번에 걸쳐 박스아트가 변경되었습니다. 아래 참고 사진의 가운데에 놓인 제품이 1959년~1960년식 2nd 버젼이고, 맨 위에 놓인 제품이 1960년~1965년식 3rd 버젼입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1959년~1960년의 2nd 버젼입니다. 개인적으론 좀 더 사람내음나는 삽화 형태의 1st 버젼을 선호하는데 타운플랜 중에서도 극초기 시절의 아이템들은 정말 어지간한 공력 가지고는 입수하기가 어렵더군요. 돈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라 3대가 덕을 쌓아야...

 

 

 

 


서두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제품을 살펴보지요. 먼저 박스는 두께가 약 2.5cm 정도로 매우 얇습니다. 옆면엔 각 유럽국가 언어별로 System in Play 를 뜻하는 문구가 쓰여져 있고 레고 폰트 디자인도 요즘의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레트로풍의 디테일이라 할 수 있죠.

 

 

 

 


Esso 는 舊스탠더드 오일의 실질적 적통인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의 브랜드명(Standard Oil ; S.O를 발음 나는대로 표기) 입니다.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은 이후에 Exxon 으로 바뀌고, 그러다가 나중에 또 뉴욕 스탠더드 오일의 후신인 Mobil 을 합병하면서 현재 세계 초메이저 석유 회사 중 하나인 ExxonMobil  이 된 것이지요.

아래 참고 자료들이 구글링으로 입수한 비슷한 시기의 실제 Esso 주유소 전경입니다. 사진의 분위기로 짐작해 보건대 #310 의 디자인은 고증에 충실하여 꽤나 사실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뚝뚝하고 투박하지만 디자인 감각이 유치하지 않고 진중하다는 점은 50~60년대 레고들의 대체적인 특징인데요, 이러한 점은 향후 레고랜드 레이블 시대의 다소 유아적인 디자인과 비교해보면 뚜렷이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왠지 디키즈 874를 입고 맨들어야할 느낌...

 






전체 구성은 크게 주유소 본관, 유조탱크차, 주유기, 간판으로 이뤄집니다. 주유소 본채만 레고 블럭으로 조립하는 형식이고 나머지는 타운플랜 시대 고유의 1:87 HO 스케일 악세서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1:87 HO 다이캐스팅 악세사리는 원하는대로 모양을 뽑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바로 이러한 부분이 주유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매우 현실감있게 살리고 있는 요소가 아닌가 합니다.

특히나 아날로그 다이얼 형태의 주유 계량기가 매우 고풍스럽고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군요. 페인팅이 일부 벗겨진 빨간 유조차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집니다. smøreolie 은 기름을 뜻하는 덴마크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 악세사리들은 꼭 #310 을 구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각개 판매를 통해서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게 디오라마를 꾸민다는 타운플랜의 원래 기획의도에 걸맞게 당시엔 이런 형태의 파츠 판매가 흔하고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조립설명서는 따로 존재하지 않고 박스 안쪽에 그림 형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옛날 인스 특유의 불친절함과 단순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옵니다. 모든 조립을 5단계 내로 마치라고 하는군요. 간결미 보소 안쪽 테두리에 빙둘러 깨알같이 그려진 타운플랜 시리즈 부품 도감도도 한 번 주목해 보세요.

 

 

 




이 제품은 이미 50세를 훌쩍 넘은 나이의 아주 아주 옛날 레고입니다. 강산이 변해도 이미 다섯 번이나 변한 세월인데요, 그간 교체 및 보수 없이 오리지날을 유지했다는 가정하에 오늘날 레고의 모습과는 다른 부분들이 몇가지 존재합니다.

첫째, 와플 플레이트 - waffle bottom plate 입니다.
플레이트의 밑바닥이 현재와 같은 원형이 아니라 사각형 격자형태인데 이게 마치 와플을 닮았다하여 해외 빈티지 콜렉터들 사이에선 와플 플레이트라는 애칭으로 통합니다. 1955년 ~ 1962년에 걸쳐 사용되었고, 부품간 결합은 각 사각형 격자에 돌기 (stud) 를 직접 끼우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둘째, 사진 우측 하단에 놓인 4 x 8 stud curved left plate 부품입니다. 일면 평범해 보이지만 1970년 말미에 단종되고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부품으로, 특별히 #310 에 수록된 것은 가장자리에 빨간색 띠가 칠해진 유일무이한 부품이라 굉장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 당시 레고 블럭들은 ABS 수지가 아닌 셀룰로스 아세테이트로 생산되었습니다. 이 재질은 열과 습기에 취약하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쉽게 형태가 변형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대의 레고 블럭 결합방식은 뭐랄까요, 블럭을 탄탄히 끼워 맞춰나간다기보단 그냥 얹어 놓아서 간신히 버티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요즘의 stud & tube 를 사용한 3 points interlocking 방식에 비하면 결속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게다가 블럭 자체의 형태까지 쉬이 왜곡되다보니 그 결과 보시다시피 블럭간의 간극이 엉망진창이고 속칭 아다리가 전혀 안맞게 됩니다.

 

 

 



이렇게되면 또 횡압력에 취약해서 조금만 힘을 가해도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등, 레고 특유의 뽀득뽀득 맞아들어가는 손맛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죠. 한마디로 극초기 레고의 단점과 불완전성을 극명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이는 뭐 #310 만 그런것이 아니라 오래된 - 특히 셀룰로스 아세테이트 재질로 생산된 빈티지 제품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기껏 플라스틱 조각이긴해도 오랜 시간이 흘러 옛날의 건강했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보면 좀 애처로운 생각이 들고 한편으론 인생사에도 대비되는 것 같아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제라드가 리버풀을 떠날 줄은

#310 은 본디 단품으로 제작된 모델이었지만 #810 Town Plan 이나 #725 Town Plan 에서도 똑같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레고들은 타운플랜 시리즈를 집대성하는 종합선물셋트 개념의 단품으로서, 오디오에 비유하자면 올인원 컴포넌트 같은 모델이었습니다. 타운플랜은 이거 하나면 ok 라는거죠.

 

좌) 810 Town Plan (1961), 우) 725 Town Plan for USA/CANADA (1961)

 

 

이쯤되면 어떤 모델이 딱 떠오르실텐데요, 바로 #10184 Town Plan 입니다. 2008년, 레고블럭 특허출원 50주년을 기념해 출시된 #10184 Town Plan 는 #810 Town Plan 의 오마쥬 모델로서 당시 레고의 모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제품입니다. 박스아트엔 키엘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 유명한 사진이 바로 #810 Town Plan 표지로 사용된 사진이죠. 엄밀히 말하면 #810 Town Plan 은 1961년에 제작된 기성품이고 실제 저 사진을 촬영한 시점도 1960년으로 알려져 있어 #10184 박스에 써진 1958 이란 숫자는 사실 표기상의 작은 오류입니다.

#10184 에서 재현한 주유소는 원작을 대체로 비슷하게 모사하고 있지만 Esso 대신 레고사 자체 브랜드인 Octan 을 사용했다는 점, 오리지널 1:87 HO 스케일을 현대의 미니피겨 스케일로 개조했다는 점, 그리고 과거엔 표현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 디테일들(가령 주유소 세차장 파트) 을 가미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느낌을 한 번 비교해보세요.

 

이 모델, 제 기억으로 출시 당시에 다른 만번대 하고 안어울린다, 하프컷 방식의 반쪽 자리 주제에 가격이 비싸다 등의 혹평도 꽤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넘버링이 만번대 라는 점에서 빚어진 오해죠. #10184는 애초에 제작 컨셉이 당시 유행이던 소위 만번대 삼총사 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제품입니다.

 

 

10184 Town Plan (2008)





낮은 자세에서 바라본 주유소 전경입니다. 저는 이 구도가 제일 마음에 듭니다. 들쭉날쭉한 벽돌 유격과 누렇게 변색된 지붕이 마치 오랜 세월 기름때로 점철된 낡은 주유소를 암시하듯 매우 독특한 풍미를 자아내는군요. 왠지 미국의 후미진 황야의 시골 구석에 있음직한 주유소가 연상됩니다.

 

부모님뻘 연배의 1959년生 레고...
귀엽다, 예쁘다라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오랜 세월 앞에 왠지 모르게 숙연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복잡미묘한 그런 레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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